슬롯머신

지방 소멸이라는 일본 사회의 큰 과제에 대응하기 위해 온천 료칸을 거점으로 지역을 다시 살리는 작업을 이어오고 있는 사람이 있다. ‘슬롯머신(温泉道場)’의 창업자인 야마자키 토시키(山崎寿樹) 대표는인구 1만 명 남짓한 시골 마을의 오래된 료칸이나 목욕탕을 사람들이 이유 없이 모이고 싶게 만드는 ‘타마리바(たまり場, 대기실 혹은 집합소)’로 바꾸며 관광에 대한 고정관념을 바꾸고 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그가 슬롯머신 주민과의 공생을 핵심 전략으로 삼고 있다는 점이다.그는 이 색다른 시도를 위해 여러 대학과 손잡고, 슬롯머신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는 다양한 실험을 해왔다.

지난 4월 2일 해외 대학 중 처음으로 광운대학교와 협약을 맺기 위해 서울을 찾은 그를 만났다.

목욕탕과 카페 마니아가 만든 ‘목욕탕 카페’

야마자키 토시키는 일본의 대표적인 경영 컨설팅 회사 ‘후나이소켄(船井総研)’에서 활약하던 촉망받는 컨설턴트였다. 그의 전문 분야는 바로 슬롯머신산업. 그는 전국을 누비며 1500곳 이상의 슬롯머신과 찜질방을 직접 찾아 다녔다. 슬롯머신 애호가인 동시에 카페 마니아기도 했던 그는 수백 곳의 카페를 돌며 공간의 분위기와 감성을 관찰하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그는 문득 ‘사람을 쉬게 하고, 머물게 만드는 슬롯머신과 카페를 결합하면 어떨까?’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렇게 자신이 사랑하는 두 공간을 융합해 새로운 문화를 만들고자 한 아이디어는 훗날 ‘오후로(お風呂, 목욕탕) 카페’라는 브랜드로 구체화됐다.

창업을 향한 그의 준비는 오랜 시간에 걸쳐 이뤄졌다. 자영업을 하시던 부모님의 영향을 받아 자연스럽게 독립에 대한 꿈을 키웠고, 이를 위해 대학에서는 회계학을 전공해 재무 지식을 쌓았다. 직장도 창업에 도움이 될 만한 기획, 마케팅, 재무 등 경영 실무 전반을 배울 수 있는 곳으로 선택한 것이 바로 후나이소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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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입사 5년 차가 돼 그가 마침내 독립을 결심하던 시점에 고향인 사이타마현에서 한 통의 전화가 걸려온다. ‘다마가와 온천(現 쇼와 레트로 온천 목욕탕 다마가와 온천(昭和レトロな温泉銭湯 玉川温泉))’과 ‘하쿠주의 유(現 오후로 카페 하쿠주의 유(おふろcafé 白寿の湯))’의 운영을 맡아줄 수 있겠느냐는 제안이었다. 그는 이 기회를 창업의 발판으로 삼기로 한다. 익숙한 업종에 고향이라는 지리적 이점까지 갖춘 최적의 조건이었다. 그리고 이듬해 3월 9일, 그는 퇴직금과 저축을 모두 투자해 ‘주식회사 슬롯머신(株式会社 温泉道場)’을 창업했다. 이는 바로 동일본대지진이 일어나기 이틀 전의 일이었다.

낡은 슬롯머신시설을 5만 엔으로 재생 시키기

일본 전역이 충격과 침묵에 빠졌던 동일본대지진 직후 시작한 야마자키의 도전은 말 그대로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의 출발이었다. 게다가 기존 시설의 운영을 맡는 형식이었기에 이미 일하고 있던 직원들까지 그대로 책임져야 했다.

야마자키가 인수한 다마가와 슬롯머신과 하쿠주의 유는 2011년까지 오랜 기간 적자를 면치 못하고 있던 시설이었다. 당시 그가 손에 쥐고 있던 자금은 고작 100만 엔. 그럼에도 그는 은행 대출 없이 사업 인수를 결행했다. 다소 무모해 보일 수도 있었지만, 그 배경에는 슬롯머신업계 300여 개 기업을 상대로 쌓아온 컨설팅 경험이 있었고, 이를 통해 도출한 정밀한 매출 예측이 그의 확신을 지탱해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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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금이 넉넉하지 않았기에 대대적인 시설 리뉴얼은 불가능했다. 야마자키는 하드웨어에 손대는 대신, 매달 5만~10만 엔 규모의 소액 예산으로 운영 가능한 콘텐츠 개발과 브랜딩 전략에 집중했다. 다행히도 두 시설 모두 수질이 뛰어나 지역의 노년층 슬롯머신 마니아들 사이에서는 인지도가 있었기에, 그는 기존 고객의 재방문율을 높이는 데 주력했다.

야마자키는 지역 주민과의 신뢰를 쌓기 위해 각종 행사에 빠짐없이 참여했고, 궂은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슬롯머신을 찾는 고객들의 반응을 세심히 살피고 직접 의견을 들으며, 서비스 개선에 반영했다. 그렇게 조금씩, 그러나 꾸준히 매출이 오르기 시작했다. 그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한다.

“비용 대비 효과가 가장 컸던 전략은 ‘후로콘(お風呂コン, 목욕+미팅)’ 이벤트였습니다. 60세 이상 시니어층을 타깃으로, 영업 시작 전 아침 시간에 족욕, 식사, 노래방 체험을 결합한 프로그램을 마련했죠. 고객 반응이 정말 좋았고, 언론에서도 주목하면서 자연스럽게 업장도 알려지게 됐습니다.”

이러한 이벤트와 꾸준한 개선 노력의 결과, 10년 넘게 적자를 이어오던 시설은 단 몇 개월 만에 흑자 전환에 성공했다. 1년 후 결산에서 야마자키가 초기에 세운 연간 매출 예측과 실제 수치는 고작 1%의 오차를 보였을 뿐이다. 그리고 창업 후 2년이 지나, 탄탄한 실적을 바탕으로 처음으로 은행 문을 두드렸고, 그 실적이 높은 평가를 받으면서 마침내 자금 조달에 성공했다. 그는 그 자금으로 두 시설의 내부 리노베이션까지 실현해 냈다.

교육하기 좋아하는 대표의 신입사원 채용

야마자키는 적자에 허덕이던 오래된 슬롯머신 시설을 흑자로 전환시키는 데 성공했지만, 내부적인 과제도 있었다. 오랫동안 근무해온 직원들과의 관계는 녹록지 않았고, 이들이 자율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하도록 유도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이에 그는 2012년부터 본격적으로 신입사원을 채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신이 과거 교생실습과 학생 지도 경험을 통해 쌓은 노하우를 바탕으로, 자신의 경영 철학에 공감하는 인재를 직접 길러내기로 생각했다.

야마자키가 특히 공을 들인 부분은, 직원들이 단순히 지시를 따르는 인력이 아니라, 현장 경험과 기획 업무를 유기적으로 넘나드는 창의적 인재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었다. 바쁜 시간대에는 고객 응대를, 한가한 시간대에는 기획·디자인·홍보 등 사무 업무에 참여토록 유도했으며, 필요에 따라 점포 간 이동도 이뤄졌다. 이러한 운영 방식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서비스 현장을 경험해 본 사람이야말로 고객에게 진짜로 통하는 기획과 디자인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그는 현장을 경험한 직원들이 고객의 니즈를 가장 잘 이해하며, 새로운 형태의 서비스업 모델을 제안할 수 있다고 믿었다. 직원들에게는 자유롭게 아이디어를 제안하고, 이를 발표할 수 있는 기회도 제공했다. 우수한 기획안은 바로 승인돼 예산을 배정받고 실행에 옮겨졌다.

또한 업무 유연성을 높이기 위해, 직원들이 5주 중 80%는 배정된 업무를, 나머지 20%는 스스로 선택한 프로젝트나 관심 있는 분야의 업무에 참여할 수 있는 제도도 도입했다. 이처럼 다양한 경험을 쌓고, 적극적으로 기획에 참여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든 것은 장기적으로 모든 직원들이 언젠가는 ‘자신만의 창업’을 실현하길 바라는 야마자키의 창업 철학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야마자키의 경영 철학은 신입사원들에게도 자연스럽게 전파됐고, 2012년 이후 새롭게 합류한 직원들은 자발적으로 아이디어를 제안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창의적 제안과 도전이 쌓여, 결국 ‘슬롯머신’의 대표 브랜드라 할 수 있는 ‘오후로 카페’의 탄생으로 이어지게 된다.

슬롯머신의 모든 세대를 사로잡는 목욕탕, 카페 그리고 콘텐츠

슬롯머신에 입사한 젊은 직원들이 이 회사를 선택한 이유는 분명했다. 바로 자신이 하고 싶은 기획이나 디자인을 실제 현장에서 직접 실행해볼 수 있다는 점 때문이었다. 그들은 야마자키에게 몰려드는 파산 직전의 온천 시설을 어떻게 되살릴 수 있을지 아이디어를 모으기 시작했고, 그 중심에는 하나의 큰 전제가 자리하고 있었다. 바로, 온천 시설은 ‘지역 주민’이 찾아주지 않으면 절대 유지될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지역에서 사랑받는 시설이 되기 위해선, 지역 고객이 무엇을 원하고 어떤 행동을 보이는지를 끊임없이 관찰하고, 그에 맞춘 전략을 즉각 반영해 누구나 편안하게 이용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슬롯머신은 이러한 관점에서 각 시설이 위치한 지역의 특성과 고객층에 따라 전혀 다른 콘셉트와 분위기를 가진 공간을 만들어갔다. 일률적인 브랜드가 아니라, 하나하나가 지역 맞춤형으로 운영된 셈이다. 브랜드 이름 역시 단순한 목욕탕을 넘어 감성을 담아 ‘오후로 카페 우타타네(おふろcafé Utatane)’로 정했다.

야마자키 토시키 대표
야마자키 토시키 대표

야마자키는 젊은 고객층과 지역 주민 모두가 싫증 나지 않도록, 다양한 시도를 이어갔다. 지역 대학과 협력해 축제를 후원하고, ‘목욕탕 아이돌 그룹’인 OFR48을 만들었으며, 사진 찍기 좋은 포토존을 곳곳에 배치해 SNS에서 자연스럽게 확산되도록 유도했다. 이는 특히 젊은 세대에게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점차 입소문이 퍼지면서 모든 시설은 1년 내에 흑자 전환에 성공했다.

이 과정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직원들 스스로가 기획자이자 디자이너, 마케터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주도적으로 움직였다는 점이다. 이들의 꾸준한 미디어 PR 덕분에 다양한 매체에 소개됐고, 가족 단위 고객부터 관광객까지 폭넓은 고객층이 유입되기 시작했다. 또한 슬롯머신은 이타마현 내에만 집중 출점하는 ‘도미넌트 전략’을 취했고, 덕분에 사이타마 지역 주민들 사이에서는 가까운 슬롯머신 지점을 모두 찾아다니는 ‘팬덤’ 현상까지 생겨났다. 현재 인기 있는 시설 중에는 하루 평균 1400명의 고객이 찾는 곳도 있을 정도라고 한다.

사이타마에서 해외로

야마자키 대표와의 인터뷰에서 인상 깊었던 점은, 슬롯머신 밀착과 해외 진출이라는 두 가지 방향성을 이미 2011년 3월부터 동시에 추진해 오고 있다는 사실이다.

슬롯머신 밀착 전략으로는 파산 직전이던 프로야구 3부 리그 팀을 인수해 흑자팀으로 바꿨는데, 단순한 구단 운영을 넘어 선수들을 슬롯머신 학교에 체육보조교사로 파견해 슬롯머신사회와의 연결고리를 만들고, 다양한 커뮤니티 콘텐츠를 통해 슬롯머신 주민들과의 교류를 활발히 이어가고 있다. 스포츠를 매개로 한 슬롯머신 활성화 전략의 대표적 사례라 할 수 있다.

한편, 해외 진출에서는 2017년부터 사우나의 본고장인 핀란드 시장을 겨냥한 사업을 본격화했다. 그 상징적인 성과 중 하나가 ‘Sauna Heating World Championship’에서 세계 4위를 입상한 것이다. 이를 계기로 핀란드와 사이타마 간의 문화 교류가 이어졌고, 대회에 참가한 직원은 핀란드 디자이너와 협업해 슬롯머신에서 착용하는 찜질복을 디자인하기도 했다. 이어 핀란드 현지에 지사를 설립하며, 일본식 슬롯머신 문화를 유럽에 소개하는 교두보를 마련했다.

이 뿐만이 아니다. 야마자키 대표는 매년 한국의 찜질방을 직접 방문하며, 노후화된 시설들의 재생 가능성을 면밀히 검토하고 있다. 그는 한국의 사우나 문화가 슬롯머신사회와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는 점에서, 일본과 마찬가지로 슬롯머신 활성화의 중요한 거점이 될 수 있다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지역 활성화란 ‘교류 인구가 늘어나는 것’과 ‘지역 경제가 안정되는 것’, 이 두 가지가 핵심이라고 생각합니다. 슬롯머신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지역 업체에 납품을 맡길 수 있는가, 지역 상점에 고객을 유도할 수 있는가, 그리고 지역 주민에게 얼마나 일자리를 제공할 수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방문객의 약 80%가 지역 주민이기 때문에, 지역 경제가 안정되지 않으면 온천 시설 운영도 지속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야마자키 대표는 본사를 여전히 사이타마현의 인구 1만 명 남짓한 작은 마을에 두고, 이 작은 마을에서 해외 시장의 문을 두드리는 꿈을 실현해 가고 있다.

올해 42세의 젊은 나이지만 지난 15년간 적자와 파산 위기에 놓인 슬롯머신 시설과 프로야구단을 회생시켜 온 야마자키 대표. 그런 그가 한국의 지역 슬롯머신이나 찜질방을 살려내는 새로운 기적을 만들어 낼 수 있을지 기대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