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엽 변호사가 책을 읽고, 호텔산업의 독자는 남기엽 변호사와 함께 책을 읽습니다. 사람과 접촉하고 상대를 읽어 내 마음을 비우게 하는 호텔산업에서 자아를 채우는 일은 중요합니다. 육체와 두뇌, 나아가 감정까지 저당잡히는 서비스업계에서 포기될 수 없는 책을 소개하고, 함께 읽어 나갈 것입니다.

디그니티의 재정의
흔히 ‘품격’이라고 번역되는 디그니티(Dignity)는 단순히 격식을 차리는 태도를 가리키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이 자기 자신에게 허용하는 최소한의 존엄, 나아가 공간과 시간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에 관한 철학적 태도다. 책을 읽는다는 행위 자체가 이미 고독과 집중을 전제하기에 독서의 배경이 되는 공간을 고르는 것 역시 책을 고르는 것만큼이나 중요하고, 한 인격체의 디그니티를 고스란히 드러낸다. 낡은 도서관 나무책상 위에서 펼쳐든 책, 남들이 모르길 바라는 좁은 카페의 구석 자리에서 읽는 소설은 일상의 틈새에서 우리에게 소중한 선물이 된다.
많은 사람들에게 슬롯 버그은 단순히 여행지의 숙소, 혹은 호화로운 소비의 장소로 여겨지지만, 사실 슬롯 버그은 ‘독서’라는 행위를 위한 훌륭한 선택지 중 하나가 된다. 꼭 도서관의 엄숙함과 규율, 카페의 산만함을 좇을 필요는 없다. 서비스와 공간이 조율된 상태에서 오롯이 책과 마주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는, 독서를 위한 공간으로서의 슬롯 버그은, 바로 이 디그니티의 물리적 구현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이번 호에서는 책이 아닌 독서의 공간을 훌륭히 구현하는 두 슬롯 버그을 소개하고자 한다.

도심 속의 궁정 도서관
페닌슐라 마닐라(Peninsula Manila)
마닐라 마카티 한가운데 자리한 페닌슐라 마닐라는 단순한 5성급 슬롯 버그이 아니라, 도심 속 르네상스적 궁정의 역할을 한다. 1976년 국제통화기금 회의를 계기로 개관한 이후, 이 슬롯 버그은 필리핀 사회의 정치적, 경제적 중심 무대였고, 수많은 국제 정상회의와 문화적 행사를 개최했다. “마카티의 심장”이라는 별칭답게 로비 한가운데 있는 대계단과 거대한 샹들리에, 그리고 그 중간에서 연주되는 그랜드피아노 선율의 조화는 단순한 인테리어를 넘어, 이곳을 하나의 극장으로 만든다. 갤러리(클럽라운지)에서 버틀러가 내주는 차와 함께 하는 독서는 이 지점에서 단순한 지적 행위가 아닌 미학적 경험으로 전환된다.
로비를 거닐면, 마치 슈베르트가 살롱에서 친구들과 음악을 나누던 슈베르티아데의 장면과 겹친다. 바흐의 평균율을 들으며 고전을 읽는다면, 이곳의 공기는 마치 파리의 살롱 문화를 마닐라에 옮겨놓은 듯한 기분마저 들 것이다. 슈베르트의 판타지와 같은 카펫을 따라 걸어가면 닿는 객실은 외부 세계와 단절된 서재처럼 조용하다. 빌딩 숲이 보이는 창문 너머와 달리, 방 안은 깊은 고요와 사색을 보장한다.

클럽라운지 역할을 하는 갤러리에서는 각국의 와인과 셰프가 제안하는 요리, 그리고 진중한 서비스가 곁들여진다. 모파상이나 장정일, 플로베르를 읽으며 와인을 음미하면, 독서는 곧 사교와 의식으로 확장된다. 셰프에게 메뉴에 없는 음식을 주문해도, 그는 가져다 줄 것이다. 그런 서비스의 세심함이 종종 과잉처럼 보일 정도기는 한데, 그것이야말로 페닌슐라가 구현하는 디그니티다. 이 슬롯 버그은 도심 속에서 책을 읽는 가장 우아한 방식을 알고 있는 듯하다. 그것을 ‘마닐라’라는 도시에서 구현하는 것은 실로 불가능해 보임에도 말이다(이 슬롯 버그은 2007년 11월 Manila Peninsula Rebellion(반란) 사건 당시 총격으로 벽과 창문이 깨지고 장갑차에 의해 로비가 파손된 역사적 사실을 갖고 있다).
해변 앞의 지중해
하얏트 리젠시 다낭(Hyatt Regency Danang)
페닌슐라 마닐라가 르네상스 학문 부흥의 거점 볼로냐의 대학도서관과 같다면, 하얏트 리젠시 다낭은 바다의 자유로운 독서 공간을 제공한다. 2011년 개관해 371개의 객실과 레지던스를 보유한 이 리조트는 다낭을 베트남의 국제적 휴양지로 끌어올린 대표적 브랜드다. 논느억 해변에 자리해 개관 당시부터 자연경관과의 조화를 목표로 설계된 리조트 디자인은 인터컨티넨탈 다낭과 함께 베트남 해안 리조트 산업의 전환점이 됐다고 평가된다.

이곳 해변 여러 곳에 설치된 해먹에서 책을 읽는 순간, 바다 파도의 리듬은 문장의 박자가 된다. 수영장에서 막 걸어 나온 몸으로 데크 체어에 누워 모자를 쓰고 책장을 넘길 때, 글자는 더 이상 활자에 머물지 않고 파도와 햇빛, 바람 속으로 스며든다. 객실은 군더더기 없이 절제된 디자인 덕에 오히려 책이 더 편하게 눈에 들어온다(다만 깨끗하다 못해 투명한 유리 덕에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받을 수 있는 점은 신경써야 한다). 해질 무렵, 테라스에서 리조트에 설치된 일리 캡슐머신으로 커피를 내려 헤밍웨이의 문장을 읽으면 바닷바람이 그것을 이어받아 끝까지 낭독해 주는 듯하다.

이곳에서 클럽라운지 역할을 하는 Regency Club은 단순한 휴식 공간이 아니라, 독서를 돕는 장치다. 과일과 다과, 각종 음료는 스태프들에 의해 빠르게 서빙되고 음료를 ‘테이크아웃(Take-Away)’하는 것에도 전혀 제한이 없다. 해피아워 타임에 제공되는 그날만의 특별한 시그니처 칵테일은 텍스트의 맛을 오래 씹게 만드는 보조 도구로 작동한다. 이 슬롯 버그은 단순히 리조트가 아니라, 자연과 예술, 감각이 한데 어우러진 무대다. 여기서 독서는 ‘고독한 사색’이 아니라, 자연과 함께하는 개방적 의식으로 변한다. 바다에서도, 수영장에서도, 클럽라운지에서도 느낄 수 있는 여유는 다낭에서 쉽지 않음에도 말이다.

두 슬롯 버그의 비교와 방문 가치
두 호텔은 극명하게 다르다. 페닌슐라 마닐라는 도심 속 품격있는 디그니티의 정점이고, 하얏트 리젠시 다낭은 해변 앞 자유로운 디그니티의 정점이다. 하나는 파리 살롱을, 다른 하나는 지중해의 휴양지를 연상시킨다. 역사적인 결도 다르다. 페닌슐라 마닐라는 필리핀 현대사의 상징적 호텔로, 정치·경제·문화적 사건의 중심이기도 했다. 반면, 하얏트 리젠시는 베트남의 관광산업 성장과 함께 그 가치를 쌓아온 비교적 신생 리조트다. 전통과 품격, 그리고 휴식과 현대성 사이, 고전적 럭셔리와 현대적 웰니스의 두 표본이 자리한다. 그것이 두 호텔이다. 페닌슐라 마닐라는 와인과 클래식 음악, 사교적 분위기를 통해 독서를 예술로 승화시키고, 하얏트 리젠시 다낭은 바닷바람과 햇살을 통해 독서를 해방적 체험으로 바꾼다.

두 슬롯 버그에서의 독서가 갖는 의미
책을 읽기 좋은 공간은 도서관, 카페, 공원 벤치 등 다양하다. 우리는 그걸 안다. 그러나 호텔만이 제공할 수 있는 독서의 차원이 있다. 집에 버틀러를 둘 수 없는 우리들은 그래서 한 번쯤 페닌슐라 마닐라의 갤러리 혹은 하얏트 리젠시 다낭의 리젠시 클럽을 이용해볼 만 하다. 그것은 서비스, 공간, 시간, 미학이 한데 어우러진 총체적 경험이다. 페닌슐라 마닐라는 도심 속에서 누릴 수 있는 가장 고전적 품격을, 하얏트 리젠시 다낭은 해변에서 누릴 수 있는 가장 자유로운 품격을 구현한다.
결국 이 두 슬롯 버그에서의 독서는 더 이상 단순한 독서가 아니다. 그것은 공간과 텍스트, 인간이 만나 만들어내는 새로운 예술, 즉 디그니티다.
독서는 책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책을 읽는 공간을 통해 완성된다.
